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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의 지각변동: 재판소원 1호 사건과 심리불속행의 위기
사진:연합뉴스

권력의 충돌인가, 기본권의 확장인가: 헌재 '재판소원 1호'의 파장

[기사 주요 요약]
헌법재판소가 2026년 3월 '재판소원' 제도 시행 이후, 녹십자의 '백신 입찰 담합' 과징금 사건을 제1호 심리 대상으로 선정하며 전원재판부에 회부했다. 이는 대법원의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에 대해 헌재가 사법적 판단을 내리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어, 양 기관 간의 사법 주권 갈등이 재점화되고 있다. 특히 대법원이 우려해온 '4심제 논란'과 대형 로펌 주도 사건이라는 '강자의 도구' 비판이 동시에 제기되며 법조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1. 봉인 해제된 재판소원: 사법부 불신을 넘어선 새로운 구제 수단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재판소원 제도가 마침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한 달간 접수된 500여 건의 사건 중 대형 제약사인 녹십자가 제기한 행정소송 확정판결 취소 청구를 '1호 사건'으로 낙점했습니다. 이는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헌재가 다시 들여다보는 실질적인 4심제의 서막으로 해석됩니다. 그동안 대법원은 재판소원이 도입될 경우 재판의 지속과 반복으로 인한 국가 경쟁력 약화와 법적 안정성 훼손을 강력히 경고해 왔으나, 헌재는 국민의 재판청구권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최우선에 두며 정면 승부를 택했습니다.

2. '10초 재판'의 아킬레스건: 심리불속행 제도의 적법성 논란

이번 사건의 핵심 쟁점은 대법원의 심리불속행 기각 제도입니다. 상고 이유가 법령 위반 등 중대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이유를 기재하지 않고 재판을 종결하는 이 제도는, 그동안 법조계 내외에서 '이유 없는 판결' 혹은 '부실 재판'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대법원은 상고 남용을 방지하고 법률심으로서의 효율성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지만, 헌재가 이 제도의 운영 방식에 메스를 들이대기로 한 것은 대법원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셈입니다. 헌재는 이번 심리를 통해 심리불속행이 가능한 경우와 불가능한 경우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함으로써 대법원의 재량권을 제한할 가능성이 큽니다.

3. 엇갈린 유·무죄의 평결: 녹십자 사건이 지닌 사법적 모순

녹십자 사건이 1호로 선정된 배경에는 형사와 행정 판결의 불일치라는 독특한 사정이 있습니다. 동일한 백신 입찰 담합 혐의에 대해 형사 재판에서는 무죄가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소송에서는 과징금 부과가 적법하다는 패소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대법원이 이 상반된 결론을 심리불속행으로 기각해버리자, 녹십자 측은 재판청구권 침해를 주장하며 헌재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사실관계가 동일함에도 법리 적용이 다른 상황을 대법원이 방치했다면,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위반한 것이라는 논리가 형성된 것입니다.

4. '강자의 도구'인가 '권리 구제'인가: 1호 사건 선정을 향한 시선

하지만 헌재의 이번 결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500건이 넘는 사건 중 하필 대형 로펌이 대리하는 수십억 원대 과징금 사건을 첫 심리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사법부 일각에서는 "재판소원이 서민의 기본권 구제가 아닌, 거대 자본과 대형 로펌이 대법원 판결을 뒤집기 위해 활용하는 상고 연장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헌재가 수많은 각하 처분 끝에 고른 사건이 국민 일반의 보편적 인권과는 거리가 있는 기업 담합 사건이라는 점은, 재판소원 제도의 정당성 확보에 있어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전망입니다.

5. 사법권 최종 해석의 패권 다툼: 최고 기관 간의 긴장 관계

결국 이번 사건은 헌재와 대법원 중 누가 사법권의 최종적 권위를 갖느냐는 패권 다툼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1987년 현행 헌법 체제 이후 두 기관은 예우와 권한을 두고 미묘한 경쟁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만약 헌재가 대법원의 심리불속행 판결을 취소하거나 구체적인 제한을 가할 경우, 대법원의 권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법리 논쟁을 넘어 국가 사법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권력 구조의 변화를 예고합니다. 헌재가 대법원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면서도 재판소원의 실효성을 증명해낼 수 있을지, 전 국민의 눈과 귀가 전원재판부의 평의 결과에 쏠리고 있습니다.

대법원의 판결을 헌재가 다시 따져본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사법 시스템에는 거대한 지각변동입니다. 사실 '심리불속행'이라는 이름 아래 이유도 모른 채 재판을 끝내야 했던 수많은 당사자들에게 이번 헌재의 결정은 분명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첫 수혜자가 대형 로펌을 선임한 대기업이라는 점은, 이 제도가 정말 '힘없는 국민의 마지막 보루'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남기기도 하네요. 양대 최고 사법기관이 자존심 싸움보다는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본질적인 가치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해 봅니다.